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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국제저널인 〈ACS 에너지 레터(ACS Energy Letters)〉에 에너지 분야를 이끄는 여성 과학자로 소개됐다. 바로 최남순 KAIST 생명화학공학과 교수다. 5년여의 회사 생활은 최 교수가 남다른 과학자로 성장하는 데 자양분이 됐다. KAIST에서 최 교수를 만났다.

코인셀

▲ 최남순 교수가 개발한 코인 셀(동전 모양의 배터리)을 손에 들어 보여주고 있다.

| 회사에서 조직력의 중요성 배워

“최 박사, 제발 좀 참으시고 그만 들어오세요!” 만삭의 한 연구원이 몸에 맞지 않는 방진복을 억지로 껴입고 전지 실험실에 들어서자 모두가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사이클이 진행된 전지 성분들은 수분에 닿으면 쉽게 발화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실험이 드라이룸에서 진행된다. 사람 몸에서 증발하는 수분도 차단 대상이라 연구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방진복으로 무장해야 한다. “임신했다고 사무실에만 앉아 있었더니 외톨이라는 느낌이 들고 지치기도 해서 큰 옷을 빌려 입고 실험실에 계속 들어갔죠.” 최남순 KAIST 생명화학공학과 교수의 삼성SDI 재직 시 일화다. 최 교수는 “그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며 회사 생활을 회상했다.

최 교수는 현재 전해질 첨가제 소재를 개발해 리튬 이차전지 전극의 효율을 높이는 연구를 하고 있다. KAIST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녀는 박사후연구원이나 교육자의 길을 가는 대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최 교수는 “전지 분야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되면서 제조업체에 취직해 학교에서 배웠던 작은 시스템이 아니라 실제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다”며 “나중에 연구소장으로 인정받고 산업계의 리더가 되는 꿈을 꿨다”고 밝혔다.

그녀는 2004년 삼성SDI에 입사했다. 최 교수는 “이 분야의 박사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일하며 배웠다”며 “1년 정도 지나자 웬만한 회사 장비와 시스템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회사 생활을 통해 연구역량과 함께 조직력의 중요성도 배웠다. 회사에서는 개인의 능력보다 팀의 성취가 우선시됐다. 최 교수는 “처음에는 조직에 순응해 내 일만 열심히 하는 수준이었는데, 서서히 조직력도 배우게 됐다”며 “팀원들이 조직력을 발휘해야 과제를 잘 마무리하고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지 ‘누구 덕택에 성공했다’라고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 회사에서 학교로 진로를 바꾸다

회사는 전지 소재개발 분야에서 최고 수준을 가진 일본기업 전문가를 스카우트해 조직의 리더나 자문연구원으로 활동하도록 했다. 그들로부터 전지 소재의 스펙 관리(수분함량, 개발제품에 필요한 소재 물성 등)를 배울 수 있었다. 최 교수는 “이때 경험은 소재개발에서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신규 물질 개발 플랫폼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한때 그녀는 회사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최 교수는 당시 결혼한 상태였고, 남편은 KAIST 기계공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대전시와 경기도를 오가며 주말부부로 지냈다. 최 교수는 “주중에는 집에 아무도 없고 퇴근해도 할 일이 없었다”며 “회사 문서를 밖으로 반출할 수 없어 회사에 남아 잔업을 했다”고 말했다. 꼬박 1년 6개월을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12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때 회사는 브라운관 사업을 접으면서 재정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1인당 잔업비용을 관리하던 때라 잔업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최 교수는 “상사로부터 ‘열심히 일해줘서 고맙기는 한데 업무일정을 잘 조율해보라’는 말을 들었다”며 웃으며 밝혔다. 회사는 사정이 나아지지 않자 연구원들을 사업부서로 전진 배치하면서 조직에 큰 변화가 있었다.

연구소장을 꿈꿨던 최 교수는 진로를 바꿔야 했다. 2010년 산업체 출신 교원을 구인하던 UNIST 에너지화학공학과에 조교수로 부임했다. 2021년 8월부터는 KAIST로 자리를 옮겨 연구를 계속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글박 연구자료

▲최남순 교수가 연구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 FEC 첨가제의 성능을 학계 최초 보고

전지는 작은 보청기에서부터 전기 자동차까지 많은 것에 쓰인다.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고 탄소중립 기조가 강화되면서 이차전지 연구개발도 중요해졌다. 고체 전해질을 사용하는 전고체 전지, 공기 중의 산소가 양극으로 작용하는 금속 공기 전지, 황을 양극으로 쓰는 리튬 황 전지 등 차세대 이차전지의 기술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들 전지에는 전해질이 필요하다. 전지의 기본구조는 양극과 음극의 전극, 그 사이에 전해질과 분리막이 들어간다. 전해질은 이온이 이동할 수 있게 해준다. 전해질에 적절한 첨가물질을 섞어주면 전지의 수명과 특성을 조절할 수 있다.

스마트폰과 전기차에 쓰이는 전지는 크기만 다를 뿐 소재와 구조가 같다. 하지만 요구되는 수명은 스마트폰 3년, 전기차 10년 정도로 차이가 크다. 최 교수는 “기업들은 전극 소재의 변경을 꺼리기에 전지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바꿀 수 있는 소재는 전해질”이라며 “3년 쓸 수 있는 진지를 10년 동안 보증되는 전지로 바꾸려면 새로운 물질을 넣어야 하는데, 그 전해질 첨가제를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2006년 학계 최초로 FEC(Fluoroethylene carbonate, 플루오로에틸렌 카보네이트)를 첨가제 또는 용매로 도입할 경우 고용량 실리콘 음극을 포함하는 배터리 수명이 최소 2배 이상 향상된다는 논문을 〈저널 오브 파워 소스(Journal of Power Sources〉에 발표했다. FEC 첨가제는 현재까지 대부분의 스마트폰 배터리에 쓰이고 있다.

최 교수는 그동안의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2020년 국제저널인 〈ACS 에너지 레터스(ACS Energy Letters)〉에

에너지 분야를 이끄는 여성 과학자로 소개된 바 있다.

이 저널에서는 전 세계 신진 과학자 20명을 선정했는데, 최 교수가 그중 한 명으로 포함된 것이다.

| 글러브 박스 안에서 실험에 ‘소질’ 발견

고등학교 때까지 그녀는 수학 선생님을 꿈꿨다. 하지만 당시 가장 친한 친구가 화학공학과를 지망하면서 많은 정보를 알려줬고, 최 교수도 진로를 화학공학으로 바꿨다. 최 교수는 “석유화학 산업이 발달한 시기여서 관심이 많았으며 취직을 염두에 두고 과를 선정했다”며 “그렇게 시작된 공대 공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공부가 재미있어서’ KAIST 대학원에 진학해 박정기 교수가 이끄는 고분자 재료 연구실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이 시절 자신이 실험에 꽤 감각이 있음을 깨달았다.

글박

▲ 최남순 교수는 석사 시절 글러브 박스를 다루면서 실험에 남다른 소질이 있음을 깨달았다.

수분에 민감한 소재를 다루다 보니 많은 실험이 글러브 박스 안에서 이뤄진다. 글러브는 일반 고무장갑보다 훨씬 두껍다. 손을 넣으면 감각이 무뎌지지만, 밀리그램(mg) 수준으로 적은 양의 물질을 저울에 올려 무게를 정확히 재거나 전극을 아주 작은 크기로 잘라야 할 만큼 정밀한 작업을 해야 한다. 그녀는 선배들이 소질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글러브 박스 안에서 재단이나 무게측정을 정확히 했다. 최 교수는 “실험할 때 양극은 음극보다 1mm 정도 작게 잘라야 하고 분리막은 음극보다 약간 크게 잘라 적층해야 하며 각 재료의 비틀림도 고려해야 한다”며 “정확하게 전지를 구성하니 데이터가 재현성 있게 잘 나왔다”고 말했다. 데이터는 재현성이 높으면 정확히 분석할 수 있다.

최 교수는 연구 결과를 수치로만 나타내지 않고 그림으로 표현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전지의 열화 현상 등을 해석하는 분석 기법의 수준이 높지 않았다. 최 교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재 내부의 메커니즘을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려봤다”며 “그림을 그리면 어떤 데이터가 나왔을 때 왜 그 데이터가 나왔는지 해석하기 편했다”고 말했다.

| 여성과학기술인을 위한 4가지 조언

최 교수는 산업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4가지 연구철학을 강조했다.

첫째, ‘통찰력’이다. 최 교수는 “회사 시절 많은 전문가에게 배운 것이 통찰력”이라며 “단지 소재개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재가 시스템(제품)에 들어가 다른 소재와 상호작용하는 형태까지 분석하고 연구해야 그다음 버전의 새로운 물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물론 학교 실험실에서 그램(g) 단위로 합성했던 물질을 기업에서 킬로그램(kg) 단위로 합성하는 것은 비용이나 규모, 시스템 면에서 다른 차원의 일이다. 최 교수는 “학교에서의 한계가 있지만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은 하나만 보지 않고 전체를 바라보는 자세”라고 말했다.

둘째, ‘유연성’이다. 자신의 연구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최 교수는 2006년 FEC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내가 이제 다 밝혔으니 더는 밝힐 것이 없어’라고 자신했지만, 지난 16년간 논문 인용 횟수가 높아지고 다른 연구자들이 새로운 분석툴을 활용하면서 FEC의 메커니즘도 다양하게 해석했다. 최 교수는 “연구의 유연성은 언제든지 다른 연구자가 더 높은 수준의 연구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뜻”이며 “이는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투명성’이다. 연구한 소재의 성능을 정확히 검증하기 위해 사용된 테스트 조건을 공유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데이터의 호환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실험의 자세한 노하우는 논문에 적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그 분야가 발전하려면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해 다른 연구자도 실험을 재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가 편집자문위원으로 있는 〈ACS 에너지 레터〉는 실험을 모두 공개하도록 방침을 정하고 저자들이 이를 지키도록 하고 있다. 학계에서도 투명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다.

넷째, ‘분석력’이다최 교수는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소재 및 시스템의 열화 거동을 정확히 해석해내는 것”이라며 “이를 통해 문제해결방안을 도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두 가지 물질을 조합해 결과가 잘 나왔다고 끝이 아니라 각각의 역할과 함께 조합 시 어떤 점이 왜 좋아지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분석에는 그림 그리기나 반응식 적기와 같은 방법을 추천한다. 최 교수는 “분석하면서 그림을 그려보고 현상을 가시화한다”며 “그림이 틀리더라도 실험을 반복하고 보완하면서 분석해 나간다”고 말했다.

단체사진

▲최남순 교수가 연구실의 연구원들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 ⓒ 최남순

| 전망 밝은 전해질 첨가제 연구 분야

최 교수는 연구에 의지가 있는 학생을 연구실에 받아준다. 단, 여학생의 경우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 최 교수는 “연구실에서 아르곤, 질소 등의 가스통을 많이 쓰고 있는데, 직접 손으로 옮겨야 한다”며 “모두가 연구에 바쁘기 때문에 여학생도 도구를 써서 스스로 옮기도록 한다”고 말했다. 배려심과 함께 자립심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를 기를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이다.

전해질 첨가제 연구 분야의 전망은 매우 밝다고 강조했다. 기업들은 투자비용이 크게 들지 않아 선호한다. 전지에 신규 전해질 소재를 적용할 때 기존에 개발된 전극 시스템과 양산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소재만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적합한 후보물질을 찾아 소재를 만드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최 교수는 “이 연구 분야는 기업에서 수요가 많지만, 실제 연구 인력이 많지는 않아 오히려 취업은 잘되고 있다”고 말했다.

글, 사진_고재웅 동아에스앤씨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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